명문대 진학에 눈이 멀어 교사가 돈 받고 내신성적을 조작하거나 학생생활기록부(생기부)를 조작하는 병폐가 잇따르면서 공교육의 산물인 생기부의 신뢰도가 바닥으로 추락했다는 비판이 확산되고 있다.
일부 학생과 학부모는 학교측이 명문대 진학 성과를 높이려고 성적이 좋은 소위 '우등반 학생'에게만 각종 수상대회 기회를 주는 등 '스펙 몰아주기'가 만연하다며 공정성 문제도 제기한다. 대학들도 생기부를 100% 신뢰하지 못하고 면접 등 추가 절차를 거쳐 '생기부 속 가상의 학생'이 아닌 '진짜 학생'을 걸러내려 애쓰는 실정이다.
◇ 맞춤형 생활기록부 과외까지 등장…'가짜 학생 만들기' 혈안
경북의 한 고교에 다니는 A군은 한 달에 한 번 대도시 학원 강사에게서 이른바 '생활기록부 과외'를 받는다.
강사는 A군이 다니는 학교가 주최하는 어떤 대회에 나가야 하는지를 조언하며 상을 받을 수 있도록 온갖 자료까지 챙겨주는 등 하나부터 열까지 그야말로 '맞춤형 생기부 서비스'를 제공해 준다. A군은 자발적으로 진로를 고민하고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교육의 힘을 빌려 철저히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대학입시에서 학생부 종합전형이 점점 중요해지면서 A군과 같은 사례는 대도시를 중심으로 점점 퍼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일선 중, 고교에서는 학생들의 자발적인 활동을 유도하기보다는 오만가지 대회를 열어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 집중적으로 상을 몰아주고 있다.
경기도의 한 공립고등학교 3학년 부장교사는 "상장 개수도 서류전형 합격 당락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학교마다 수십 가지의 대회를 만들기에 바쁘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봉사활동을 학부모가 대신해 주는 일도 허다하다는 건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렇다 보니 생기부는 학생의 주체적인 교육 활동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라기보다 학부모나 학원 강사의 땀, 교사의 재량이 합쳐진 결과물이라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온다.
◇ '복불복' 교사 능력…반장에게 생활기록부 맡기기도
어떤 교사가 생활기록부를 기록해주느냐에 따라 한 학생의 진로가 좌우될 정도로 교사 간 능력 차이도 생기부의 공신력을 떨어트리는 요인이다.
보통 담임교사가 직접 생기부를 작성해야 하지만 학생 수만 수십 명에 달해 학생들에게 '창의적 체험활동 실적' 초고를 써서 제출하라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문제는 학생들이 써온 초고를 담임교사가 직접 다듬지 않고 반장이나 부반장, 과목별 담당 학생에게 맡기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단 점이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다른 학생들의 생활기록부를 쓰다 보니 공정성과 투명성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생기부 작성 권한을 담임교사가 쥐고 있으니 불만을 제기하기도 어렵다.
학부모 B씨는 "수시가 대세인 상황에서 학교에서 최고의 권력은 담임교사와 교과담당 교사다"라며 "교과 발달상황 등 생활기록부 마지막에 다는 코멘트에 따라서 당락이 결정되는 구조여서 교사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학부모는 "생기부에서 상당히 중요한 항목인 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이 교사의 관심과 열정에 따라 기록되는 수준이 천차만별"이라면서 "예를들어 영어과목의 경우 같은 학년 교사가 3∼4명인데, 같은 등급의 학생들에게 기록되는 내용의 질과 수준이 교사에 따라 너무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진로진학 부장교사 C씨는 "교사가 쓰는 생기부는 맘에 들지 않는다면서 아예 사설 업체에 생활기록부를 맡겨 써온 뒤 그걸 담임에게 제출하는 학부모도 있다"고 푸념했다.
생기부 입력 권한의 엄격한 기준이 없는 것도 생기부 공신력을 위협하는 요소다.
작년 경기도에선 모 사립고 교무부장이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인 고3 자녀의 독서활동 관련 생활기록부를 담당 교사와 상의 없이 임의로 입력했다가 사표를 냈다.
해당 고교 관계자는 "생활기록부 조작사건이 아니라 절차상 실수였다"며 "이 사건 이후 생활기록부 입력 권한을 제한으로 뒀다"고 설명했다.
경북의 한 고교 교사는 "자기 학교 학생을 특정 대학에 집어넣기 위해 무리수를두는 이런 행태가 공교육 정상화를 허무는 주범이다"라고 지적했다.
◇ "서류 속 학생과 달라"…'진짜 보석 찾자' 대학 면접강화
이미 대다수 입학사정관은 일부 고교에서 자행하는 '스펙 몰아주기' 등 생활기록부의 거품 실태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다.
아주대 입학처 고지영 입학사정관은 "수상경력을 보다 보면 유독 공동수상이 많은 경우가 있다. 또 대회의 알맹이가 없기도 하다"며 "아직 생활기록부 기재 내용을 복사해 붙여넣는 교사들도 있다"고 설명했다.
생활기록부의 신뢰에 대한 의구심이 들게 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잇따를수록 각 대학은 입학전형에서 면접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고 입학사정관은 "수시전형에서 면접을 없앨 수가 없다. 기본적으로 서류를 신뢰하지만, 이것만을 100% 믿기보다 학생 개인의 역량을 평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작년엔 1차 서류 합격결과 최종합격 등수 안에 드는 수험생 중 30%에서 많게는 50%가 최종면접에 오르지도 못하는 학과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연세대 황정원 입학팀장도 "서류전형 합격자 중 동점자가 많아서 이후 있는 면접에서 뒤집힐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황 팀장은 이어 "무엇보다 학생부를 토대로 한 현 수시전형은 교사와 학생, 학교와 대학 간 신뢰가 기본이다. 이 신뢰가 깨지면 현 수시전형은 존립할 수조차 없다"고 강조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