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Korea Herald

피터빈트

'나의 음악과 가족' 신해철의 미공개 인터뷰

By 신용배

Published : Dec. 25, 2014 -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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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4일 햇볕이 유난히도 따갑던 날, 6년만에 앨범을 발매한 신해철씨를 만났다. 예상과는 달리 그는 사진 촬영에 친절하게 응해줬고 한시간 반 동안 자신의 음악세계와 가족에 대해서 솔직하고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3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 10월 27일 마왕은 우리의 곁을 떠났다. 돌이켜보니 그는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할때 가장 많이 웃었고 행복해보였다. 지면에 다 실리지 못한 고인의 생전 마지막 언론인터뷰 내용을 나누고자 한다. 



그의 음악과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 녹취된 인터뷰전문을 거의 편집없이 그대로 실었다. 좀 거친 부분이 있더라도 양해바란다. --편집자柱.


본지와 인터뷰 도중 포즈 취하고 있는 신해철 (The Korea Herald) 본지와 인터뷰 도중 포즈 취하고 있는 신해철 (The Korea Herald)


*6년여 공백 - 인생에서 가장 풍부했던 시기
*6년 동안 140 곡 완성, 그중 앨범용으로 4곡 추려
*무릅이 안 좋아서 양재동에서 방위
*평상생활 “우물대고, 대충 둘러대고, 뻥치고, 어르고"
*아직까지 애들은 음악보다 나가서 노는 것이 더 낫다
*11월에 오케스트라와 공연, 12월에는 솔로 EP 앨범 출시 계획
*12월달에는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지휘할 것 같다
*20대초반 데뷰 후  맞닥 뜨린것은 "당황, 당황"
*10년간 가장 훌륭한 성취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







Q. 이번 앨범 반응은 어떤가요? 만족하세요?



그냥 “망신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 이였는데, 상업적 스코어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신해철이 아직도 creativity를 지니고 있냐”는 것에 대한 평가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향후 계속 음악활동 해나갈 때 팬들한테 지속적으로 기대감을 줄 수 있는가, 또 평단의 최선의 respect를 받을 수 있겠냐,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거든요.



Q. 앨범 발매가 왜 이렇게 없었나요? 6년만인가요?



여러 가지 이유가 겹쳐 있었는데, 건강 문제가 좀 있기도 했고. 내가 죽을 때까지 나 스스로를 뮤지션을 주장하는 삶을 받아드릴 것이냐, 내가 이걸 결정을 해야 하는데. 지금껏 그냥 닥치는 대로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음악을 하고 잔뜩 쟁여놓으면서 했는데, 이걸 마무리를 지으려면 60~70까지 공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제 40이 넘었는데, 70쯤에 마무리 짓는다고 생각하면 30년짜리 플랜인데 얼마나 devote 할 수 있는가, 이런 개인적 문제가 있었고요.



그리고 외적으로도 이런 저런 문제들이 많았어요. 정치적인 것도 있었고. 처음에 쉴 때는 자의 반 타의 반이었는데, 나중에는 딱 이 문제 하나만 남더라고요. 음악하고 그냥 앨범 내면 되는 그런 문제였는데 괜찮았던 것 같아요, 저한테는 그 6년이라는 기간이. 가족과 가까이 지낼 수 있어서 괜찮았던 것 같고 개인적으로 본다면 제 인생 중 가장 풍부한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Q. 일단 앨범을 내기로 결정을 하신 다음 완성까지 얼마나 걸렸어요?



한 달 정도?  6년동안 쟁여 놓았던 게 많았어요. 한 140 곡 정도를 만들어 놔서, 그 중에서 4곡 정도를 추려냈고 저는 그것들을 마무리만 했으니까.



6년동안 일상의 패턴을 보면 주말이나 평일 구분 이런 것은 당연히 없고, 평소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작업하는 시간이 하루에 평균 한 17시간 인 것 같아요. 잠을 이틀에 한번 정도 몰아서 자고. 그리고 저는 이거 말고 취미가 없어요.



Q.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노동 아닌가요?



의자에 앉아서 하는 노동이라는 게,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것 때문에 체중이 불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해요. 그러다가 운동할 때에는 vocal 녹음을 딱 시작해보면 “으악 소리가 이게 뭐야!” 소리가 완전히 달라져요. 체중에 따라서도 달라지고 운동을 해도 달라지고, 사람 몸을 타니까요.



Q. 녹음하시면서 운동을 하셨나요?



Vocal 녹음하고 그럴 때 집중적으로 합니다. 평소에도 자전거 같은 것은 꾸준히 타요. 바깥에서 타는데 무릎에 좀 장애가 있으니까 전기 자전거를 쓰긴 하죠. 전기 자전거 아님 저는 자전거 못 탔을 거예요. 무릎이 안 좋아서. 남들이 들으면 해병대 갔다 온 줄 알아요, 양재동에서 방위했는데.



Q. 이번에 했던 쇼케이스는 맘에 드셨어요? 오랜만에 라이브 하신 거 아닌가요?



그렇죠. 많이 무섭죠 일단 함성 소리 나오는 게. 매니저들한테 윙크하면서 “다들 굶었구먼?” (웃음) 뭐 그런 거나 좀 다른 점은 쉬고 나왔더니 세상이 달라졌더라고요. 쉬기 전에는 유료로 쇼케이스를 하거나 팬 미팅을 하는 풍토가 없었는데,열 몇 곡을 풀 타임으로 하는 공연이 아닌데도 이런 공연이 유료로 치러지도록 바뀌었더라구요.

또 달랐던 건 음악 감상회처럼 만든 CD를 가지고 ‘자, 이거 거의 완성 된 거야’ 하고 풀어주는 그런 거였는데 그걸 듣고서 울고 있던 팬을 본다던가, 전에는 없던 것들이 생긴 거 같아요. 후반부에서는 라이브도 했는데 신곡들은 그냥 옆에서 들려주기만 했거든요.



Q. 연령대는 어떻던가요? 다양했을 것 같은데.



저한테 부담스러운 형님 또래가 무대 바로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던가, 남녀로도 성비로도 계산이 안되고요, 남자가 조금 더 많았던 거 같고, 그리고 연령대도 뭐 초딩만 아니였다 뿐이지, 이번에는 19금이였는데도 고딩들이 속여서 들어온 것 같아요. 20대~50대까지 다 있는 것 같고.



Q. 고등학생들은 어떻게 신해철씨 음악을 접했을까요?



형, 누나, 삼촌 이렇게 영향을 받는 경우가 있고요. 다르게는 제가 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고 있다가, 그런 케이스는 지금까지 되게 자주 있어요, “마왕, 마왕” 하면서 DJ로 알고 듣고 있다가 갑자기 사연자 게시판에 “마왕이 가수였어?” 하면서 충격을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는 다음날에 또 들어와서 “올 노래 나쁘지 않은데?” 이러는 경우 (웃음)

6월 홍대근처에서 공연하는 신해철 (KCA 엔터테인먼트) 6월 홍대근처에서 공연하는 신해철 (KCA 엔터테인먼트)





Q. 저도 중3 딸이 있는데, “신해철씨를 알고 있냐” 물었더니 “응답하라 1997”에서 음악이 나와서 들어봤더니 노래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음악이란 게 세대간의 이질감을 없애기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는 이제 그게 시작인 것 같아요. 제가 영국에 처음에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게 길에서 13살짜리 애한테 누구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얘가 지미 핸드릭스를 좋아한다고. 근데 저를 쳐다보는 표정이 딱 경멸이었어요. “내가 핸드릭스 얘기하는 게 웃겨?”하는 표정으로 절 보더라고요. 얘네가 되게 재미있게 사는구나 라고 느꼈어요.



Q. 타이틀 송을 쇼케이스 하는 날 결정하셨다고요?


타이틀 개념이라는 것이 뭔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프로모션 하는 노래를 정한다는 개념이겠죠. 근데 타이틀이라고 부르면 얘기가 달라지잖아요. 그 네번 째 곡을 프로모션 곡으로 투표를 했나 봐요. 그러니까 투표한 걸로 끝난 거죠.



Q. 특별히 애착이 가는 곡은 있나요?



저는 그런 개념이 거의 없어요. 사실은 앨범이 나온 다음에는 외면하는 경우가 더 많고. 왜냐하면 항상 시간도 모자라고 뭐 이런 불만족스러운 상황에서 그냥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렇게 되면 길거리에서 막 노래가 나오면 ‘아 이거 조금 있으면 분명 뽀록 날건 데, 빨리 다른 앨범을 내서 어떻게 때우고 넘어가자, 창피하다’ 계속 이런 경우들이 이어지다 보니까, 그게 습관이 되어서 만들어놓고 나서 ‘잠시라도 너를 안보면 안되겠니.’ (웃음) 발표하고 나서 한 2~3년 지나지 않으면 그 곡이랑 대하는 것이 되게…



Q. “A.D.D.a” 재미있었어요 - 내가 알고 들어왔던 신해철의 이미지, 마왕의 이미지랑 달라서 놀랐어요.



근데 제 라디오 “고스트 스테이션”을 들었던 generation 들은, “A.D.D.a”를 보면 “고스트 스테이션”의 부활이다 이렇게 얘기들 하세요. 어차피 미디어나 이런걸 통해서 보여지는 이미지들은 단편적인 거니까요. 안녕, 프란체스카나 그런 시트콤에 나와서 웃기고 그랬을 때, 사람들이 안 그럴 것 같은 애가 웃기니까 재미있다고 했는데, 저희 가족들은, 심지어 사촌들까지 전화해서 “똑같네 똑같아, 평상 생활을 찍었네” 그랬어요. 뭐가 똑같느냐고 물어보니까 “우물대고, 대충 둘러대고, 뻥치고, 어르고, 똑같잖아!” 그러더라고요. 안녕, 프란체스카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한 6개월에서 1년 가까이 찍었던 거 같아요.



Q. 아이들은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9살이랑 6살이요. 딸이 9살. (아빠 노래는 안 듣나요?) 가끔 제가 음악 듣고 있을 때 옆에 와서 들으면, 쫑알쫑알 얘기를 하는데. 사실 이건 제 잘못인데, 제가 음악을 직업으로 하다 보니까 집에서 잘 안 듣고 차에서도 잘 듣지 않으니까. 집에서 애들한테 음악을 틀어 놓고 막 늘 음악을 접해볼 수 있도록 노력을 해보기도 했는데 그래도 아직까지 애들은 음악이고 뭐고 나가서 노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음악 교육을 시킨 것도 없고.



Q. 향후 앨범 계획은 어떻게 되나요?



9월달에는 밴드 앨범이 나오고, 12월에는 솔로 EP 앨범이 하나 더 나올 예정이에요. EP는 네댓 개가 수록 되는 거고 9월은 앨범 규모로 생각하고 있어요. 조금씩 물량 조절이 있을 것 같아요. 11월달은 제가 오케스트라와 하는 공연이 또 예정되어 있어서.



Q. 넥스트 멤버는 정해졌나요?



아니요, 이젠 영원히 정해질 일이 없게 됐죠. 선입견에만 메이지 않으면 충분히 가능한 것 같아요. 세계적인 유수 오케스트라들이 조합처럼 설립돼서 그렇게 발전하는 히스토리라던가, 동계 팀들이 연합해서 하는 것들 등 여러 가지 시스템을 참고해서 몇 명의 멤버를 딱 정해놓고 그 사람들 안에서만 음악적인 교류가 이루어져야 하고 이건 다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기왕이면 이 밴드 브랜드를 우리나라에 알고 있는 사람이 꽤 있는데 조금 더 건설적으로 쓰려면 이런 방법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Q. 몇 명 정도가 투입될 예정?



그게 “넥스트 유나이티드”라고 별명을 정했었는데, 축구팀처럼, 이게 정식 이름이 될 꺼 같아요. 그리고 이 안에 각 프로젝트가 “포메이션”이라는 축구 용어가 또 붙어있어요, 그래서 넥스트 유나이티드의 포메이션-K가 12월에 붙는 건데 K는 국악 팀이거든요. 그래서 국악 관련 프로젝트고, 국악 관련 유명 뮤지션들과 여기에 멤버로 저희가 있는 거죠.. 이런 식으로 해서 포메이션 –A, B, F, J 이렇게 있는데 그 바람에 넥스트의 멤버들 아님 저하고 음악적 교류를 하고 싶은데 “넥스트에 들어와라” 하면 좀 난처한 사람들, “나보고 여름에 락 페스티벌에 나와서 물동이 집어 던지면서 공연을 하라고?” 이런 선배들이랑 일하기에는 훨씬 편해진 거죠.

각 프로젝트는 제가 conduct 한다는 것 빼고는 멤버가 한 명 밖에 (?) 없는 경우도 있어요.



Q. 국악이라는 어떻게 접목을 하시는 건가요?



그건 아직 현재 계약이 안 끝나서 off인데요, 12월달에는 아마 제가 국립 국악 관현악단을 지휘할 것 같고, 첫 곡은 임동창 선생이랑 하는 피아노 협주곡이고요, 두 번째 곡은 넥스트가 무대에 올라가는데, 두 번째 것은 마당극 형태랑 또 합쳐져서 제가 conduct를 하고 conductor는 내려와서 말뚝이로 돌아서서 이런 난장판이에요.



Q. 원래 국악을 좋아하셨나요?



처음에는 정말 싫었죠, 어떻게 보면 저희 세대에게 국악 이미지는 외국인들에게 받는 대접보다 못한 대접을 받은 것 같아요. 외국인들은 그래도 선입견이 없는 상태에서 남대문 같은 데에서 접하면 되는데, 우리 같은 경우에는 정말 지루하게 보일 수 밖에 없는 TV 국악 프로그램 같은 데서 나오면 고개를 돌리게 되는. 처음에는 반 의무감과 호기심에서 시작했는데, 왜냐면 저희가 물려 받을 악기가 몇 개 없다 보니까, 그 다음에는 역시 한국인지라 친숙해지고 이런걸 발견하고 이런 과정을 밟아가게 된 것 같아요. 초창기에는, 외국인의 입장이랑 다를 바 없는 상태에서 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한 10년 지나고 나니까 “외국인은 100년 들어도 이렇게 못 느낄걸?” 이라고 생각했어요.

국악이랑 관련된 소품들을 녹음을 한 지는 20년이 넘었어요. 그리고 이제 제가 하는 음악에 곳곳이 월드컵 응원 곡처럼 국악이 사용되어서, 국악인들 사이에서 “쟨 반 국악인이다:”라는 말이 나오면서 잘해주시는 편이에요.



Q. 처음 데뷔하신 게 1988년이라고 하는 게 맞는 건가요? 그때 했던 음악과 지금 했던 음악의 차이점이 있다면?


12월 24일이었는데 88년도가 되어서 짬 밥이 늘어난 거죠. 물론 외형적으로 보면 기술이나 환경 같은 것은 거의 신석기에서 달나라로 가는 것만큼 차이가 있으니까요. 간단하게 쉽게 설명하자면, 제가 음악을 시작했을 당시는 LP 시대였고, CD를 거쳐 MP3까지 왔으니까 음악을 담는 매체 자체가 바뀌고. 인터넷이란 그런 것도 없었던 시대이기도 하구요.

차이라고 하면 외형적으로는 어마어마한 차이죠, 지금 홈레코딩이나 컴퓨터장비 같은 걸 통해서 제가 어렸을 때 열망하던 스튜디오 작업 환경이, 각 개인의 아이들 공부방 안에 들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거거든요.

저는 사실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을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쪽이에요. 변화를 보면서 자신감을 잃는 동료들이나 친구들이 주변에 굉장히 많아요. 너무 변화가 빠르고 그리고 1~2년만 지나도 자기 이름이 잊혀지는 그런 것들, 그리고 자기가 음악적으로 막 탐닉하고 respect 했던 게 1,2년 뒤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걸 쓰레기라고 하는 그런 환경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모두들 두려워하는 거죠.

근데 제가 봤을 때에는, 변하지 않는 요소들은 정말 변하지 않거든요. 음악이 있다, 사람이 있다, 음악을 들으면 사람들은 좋아한다, 이거 이상 나머지 이야기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변화보다는 제가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무한궤도 앨범을 내기 전에, 대학가요제로 대상 타서 데뷔하기 딱 이틀 전에 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음악을 포기한 적이 있었고, 안될 꺼 같아서.

첫 앨범을 녹음할 때 그때까지 제 평생 소원은, 뮤지션이 되고, 인기 뭐 이런 게 아니라, “죽기 전에 레코딩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내가 만든 곡을 레코드 해보고 싶다, 어떻게 들리나 녹음을 좀 해보고 싶다,” 는 게 제 유일한 소원이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렇다면 지금 제가 처한 환경이 개인적으로 봤을 때는 모르겠으나 뮤지션으로 봤을 때는 그때 보다 내가 불리한 환경이냐, 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거의 모든 문제가 해결이 나니까 심적으로.

그러니까 그럴 때가 있었으니까 “잘해라 새끼야” 이런 거죠, 지금은 최소한 “내가 만든 음악을 남들에게 들려줄 길을 내가 찾을 가능성이 있을까” 그런 시기는 아니잖아요.

제가 후배들한테 했던 얘기들 중에서 나중에 문장으로도 남고 했던 것들을 보면, 이런 나라 이런 시대에 태어났으면 한 손에 오선지 들고 한 손에 계산기 드는 건 창피한 것이 아니다. 머리 굴리고 전략을 짜고, 음악과 돈을 결합하는 것에 대해 창피해 하지 마라.

 근데 때가 되면 계산기를 내려놔라, 그리고 이제 오선지만 쳐다보라는 거죠, 한계가 있으니까. 그리고 히트를 치고 싶어서 상업적으로만 곡을 전략적으로 디자인 하는 것은 좋은데, 마이크 앞에서 노래를 할 때에는 노래 가사만 생각해라, 전략 같은 것 잊어버리고.

MP3가 뭐 어떻게 돼, 다운로드 환경이 뭐 어떻게 돼, 뮤지션들이 착취 구조에 있다는 얘기도 슬슬 나오잖아요.연대해 싸워, 환경에 대해서 걱정해, 하는 거지만, 뭐 하루 종일 그것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보면 대중들의 최소한의 신뢰를 받을 만한 기회가 없었던 친구들이 있어요. 과연 내가 좋은 음악을 만든다고 해서 “시스템이 막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데 사람들이 내 노래를 들어줄까요?” 하는.. 제 생각에는 그런 생각 안하고 좋은 노래 만들겠다고 하는 편이 가장 가능성 커지는 길인 것 같아요.



Q. 요즘은 아이돌이 대세잖아요. 이건 어떻게 보세요?



아이돌 음악이 막 나라 전체를 휩쓸고 다니는 것 같은 이런 문제도, 올라가서 올라가서 보면 거창해 보이는 인간하고 삶의 문제라던가 어떤 가치관의 문제라던가 이런 거하고 다 연결이 된다고 봐요.

이태리 같은 경우도 영미 팝이 아니면 노래가 아닌, 그래서 가수들이 영어로만 노래를 불러야 되는 상황이다가 이태리 노래가 다시 힘을 얻어가는 일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30년 50년 이상 걸쳐서 진행된 일이 거든요.

근데 우리 같은 경우에는 아이돌들이 막 득세하는 문제보다는, 너무 둔감하게 아무런 관심이 없든가 아니면 그걸 보면서 땅을 치면서 나쁜 일이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든가. 제가 데뷔했을 때는 발라드가 휩쓸었을 80년대 말인데 대학가요제에 저희 말고 나머지 15밴드가 다 발라드를 불렀어요 그리고 앨범을 내면 lp에 9곡 정도 채울 수 있는데 소속사가 다 발라드로 채우라는 거에요. 근데 오히려 약간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이 시각이 정확한 게, 제가 봤을 때는 이사람 들은 지금 먹고 살려 너무 악을 먹어서 현실을 잘못 보는 것 같은데 9개를 발라드로 넌다고 9개가 다 히트가 나는 것이면... 지금 아이돌 문제도 그래요. 20에서 30대 말하자면 어덜트들의 삶의 태도에 있어서 우리가 해결을 못보고 있는 게 자기자신을 최대화 최적화 능률화 하도록 요구를 받잖아요. 스펙을 최대로 쌓고 시간을 잘 활용해서 나 자신의 소명을 찾고 내 인생 어쩌구저쩌구 근데 그러면은 음악들을 시간은 없단 말이에요.

지금의 30대 세대는 음악에 대한 존중 등에 대한 교육이 어떤 세대보다 잘 된 세대거든요.

그런데 지금 패턴을 잃어버렸어요. 원래 (지금 30대들의) 패턴은 직접 LP나 CD를 사고, 먼지를 닦고 잘 보관하며 듣는 타입이거든요. 그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건 다운로드라는 행위로 음악을 들으면서 ‘자기가 알고 있던 음악이 음악으로 안 느껴진다’는 거죠. 일종의 적응기를 거치고 있는 거에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보니, 나머지 비어 있는 공간들, 예를 들어 사람 몸이 수술을 해서 세포를 떼어낸다 하면 혈액이나 다른 것들이 메우잖아요, 근데 지금 (음악계에서) 무주공산을 아이돌이 메우다 보니까 ‘이 나라는 아이돌 밖에 없나’ 이렇게 된 거에요. 이 모든 것은 시스템의 문제지 어떤 사람이나 민족의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거죠.

저는 대중에 대해서 믿고 있는 것이 하나 있고 안 믿고 있는 것이 하나 있어요.

(제가 믿는 것은) 분명히 음악을 듣고 싶어하고, 지금 시대의 음악보다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했던 사람들은 다시 그럴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에요.

지금은 너무 비정상적인 상황이기도 하고, 확률적으로 결국 적절하게 돌아갈 거에요.

현대 사회 음악계는 그 변혁의 폭이 큰 것뿐이에요.

70, 80, 90년대 각각 다른 이유로 파도가 치다 보니, 그 와중에 자살하는 애들은 물론이거니와, 제가 봤을 때 진짜 괜찮다 죽인다 싶은 애들의 음악을 대중들은 듣지 못해요.

저야 뭐 가족들의 보호도 받고 팬들의 보호도 받아서… 사실 6년이면 일반 아이돌 수명보다 길거든요.

제가 쉬는 동안에도 꽤 핫한 아이돌 몇 팀이 나타났다 사라졌어요. 저는 계속 음악을 할 것인데 중간에 언뜻 뒤를 돌아보면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있죠, 안타까워요.

Q. 작년부터 선배들 중에서, 조용필 씨 등이 나와서 활동을 했는데, 사실 단편적이지 않았나요.



엔터테인먼트 업계, 뮤지션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게 너무 포화 상태에요. 그래서 (조용필씨 활동) 이후로 지속적으로 조용필의 소식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뉴스가 못 미치죠.

콘서트도 그렇고 활발하게 돌아갔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이번에 활동 나와서 방송국에 가서 다들 땀 삐질 삐질 흘리게 하면서 노래하고 싶지 않다고, 리허설 할 때 엔지니어 몇 명이 울고 갔다 뭐 이런 이상한 소문이 돌고 이러는 성격인데.

지금의 패턴은 웃기는 프로그램 나가서 히히하고 나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알아서 음악을 찾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지금은 그 늘 보이는 자리에는 아이돌이 나오고 있는 거죠. 그 자리에 있는 아이돌은 늘 바뀌는 거잖아요.

그들이 음악의 질을 저하시키는 것도 아니고, 시장을 왜곡시키는 것도 아닌데, 아이돌들의 풀 안에 다음 세대의 아티스트들이 거의 다 포진되어 있는 건데, 걔네 들이 다 소비되고 버려진다는 것.

아이돌로 출발해서 소녀들의 비명소리를 듣다가 내면적 성숙을 거치고, 이제 대중들과 워십의 관계가 아니라 진짜 동반자적인 관계가 되고.. 예를 들어 비틀즈 같은 선례..

아이들 얘기를 할 때,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저들 중에서 싱어송라이터, 프로듀서가 될 친구들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양현석이나 박진영처럼 아이돌로 출발해서 제작자로 변하는 사례가 있는데, 편곡은, 프로듀싱은 이제 대체 누가 할 것이냐? (현재 아이돌은) 단명하면서 버려지는 거죠.

Q. 선배 입장에서 안타까우시겠어요.



반은 안타깝고 답답하고요, 나머지 반은 할 놈이면 어떻게든 살아나오겠지 뭐 이렇게..

가끔 태지나 또래 세대 동료 뮤지션들과 얘기를 하는데, 도토리 키재기, 거기서 거기다 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우리 때는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같은 것들이 생기면서 PC통신에 의해서 우리나라 뮤지션들과 해외 탑 뮤지션들을 거의 동일하게 respect 해주는 팬을 가지게 되니까 더 용감해지게 되는 거죠. 조금 더 복잡한 시도를 해도 괜찮았고요.

그런데 시스템 면으로 따지면 한국 외 다른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 하고 한다거나, PD가 가수들을 때리는 이런 사례들 생각하면 내가 이걸 업으로 산다는 것에 많은 회의가 들기 때문에.

우리 때는 자살은 안 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죽잖아요 애들이. 그만큼 극한 상황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은 거죠. 대중들의 어떤 똘레랑스의 수준은 내려갔으면 내려갔지 올라간 게 아닌데, 사생활의 모든 측면은 모바일 등으로 관심을 받는다거나. 저희가 자주 하는 얘기가 “나이트 가서 부킹을 하고 별 짓을 다 해도 다음날이면 우리 음악 인생이 끝날 것이다 라는 고민은 안하고 살았다.” 근데 이제는 모든 행동을 24시간 ‘내가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니까 힘든 거죠.

그리고 그런 노출을 겪지 않고 ‘음반 딱 500장 팔리지만 난 내 인생 만족’ 하는 아이들은 전업을 할 기회가 없는 거죠. 우리나라는 일본 등 다른 음악 시장에 비해서 언더그라운드 시장과 메이저 시장 극과 극이기 때문에요.

Q. 본인의 사생활 노출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저는 그런 면에서는 되게 대충 살았던 것 같아요. 평생 옷을 차려 입고 길거리를 나간 적이 거의 없고, 액세서리나 이런 거, 무대 말고는 걸쳐본 적도 없고, 옷도 관심이 없고. 남들이 뭐라 그러나 그냥 살았고.

단지 20대 초반에 데뷔했을 때는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트라우마를 얻었었는데, 저는 음악을 위해서 굉장히 노력했거든요. 월간 팝송 이런 데에 나오는 레드 재플린 비틀즈니 이런 것들이 저에겐 올림푸스 동산이었고, 기타는 그곳으로 가기 위한 마법의 검이었거든요.

그런데 데뷔를 하고 나니 길을 지나가는 초등학생들에게 “저 새끼 신해철이네.” 이런 얘기를 들어야 하는 처지. 존댓말이 있고 반말이 있는 그런 나라니까요.

Q. 연예인들에 대해서 존댓말은 안 하더라고요.



그렇죠. 분명 저만해도 TV 보면서 누구 씨 이렇게 얘기하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런 걸 떠나서, 대중과 아티스트가 서로를 친구로 여기고 대등하게 여기고, 오냐 오냐 해주는 건 영국 쪽이 미국보다 훨씬 강한 것 같아요.

토요일의 잘 나가는 클럽에서부터 마켓에 이르기까지 제가 뮤지션인 것을 알면 그 나라 사람들은 되게 오냐 오냐 해줘요. 사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건 엄청난 명에나 소녀들의 비명 소리가 아니라, 공항 검색대 통과하다가 제가 뮤지션인 것을 알았을 때 거기 세관원이 윙크를 해주는 이런 정도의 안전막이 중요한 건데..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명인이 된다라는 건 근거 없는 찬사를 왕창 받게 되는 것과 참을 수 없는 비하와 모멸을 당하는 것의 간극이 끝없이 늘어나는 거라고 말했어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너는 평소에 환호성 칭찬을 많이 받으니까, 모멸감 이런 것이 플러스 마이너스 돼서 제로가 되지 않냐’ 하고 말을 하시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20대 초반의 저한테는 당황스러웠어요.

제가 알고 있는 세상이랑 달랐던 거죠. 사람들은 저만큼 음악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 프로듀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90도로 인사하는 것.

그냥 딱 중간이면 좋은데.

엄청 건방진 놈으로 찍히거나 내가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굽실거리거나 이 두 가지밖에 없다면 차라리 욕을 먹는 게 낫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처음에 1년동안 욕 바가지로 먹었어요.

제 그런 모습을 보고도 귀엽다고 여겨주고 ‘나도 그랬으니까’하고 이해해주는 선배들도 만나고.

처음 몇 년간 알려주는 선배도 없이 어떻게 할 줄 모르고, 이 모든 상황을 맞닥 뜨린게 ‘당황’이었어요 ‘당황’이었어요, 당황.

Q. 대학가요제 출신이잖아요. 음악으로 먹고 살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인간은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존재더라고요. 그래서 대학교 2학년때쯤 음악을 전업으로 하겠다고 했다가 아버지한테 싸대기를 맞았었는데, 생각해보니 중학교 1학년 때 무의식중에 음악 아니면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다고 결심했더라고요. 그런데 대학가요제를 나갔을 때쯤에는 이미 학교 생활 자체에 완전히 마음이 떠난 상황이었어요.

굉장히 괴로웠던 게, 가족을 생각하면 아무리 박살이 난 학점이라도 메우고 어떤 직업을 찾을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내가 내년, 내후년에도 고생하는 엄마 아빠를 앞으로 보면서 계속 딩가딩가 기타를 칠 수 있을까 싶었던 거죠.

대학가요제 24시간은 꿈같이 지나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저에게 다가오는 매니저들은 다 저를 남자 솔로 가수로 데뷔 시키겠다는 거지, 밴드 매니저를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어요.

처음에는 내가 만든 노래를 녹음이라도 할 수 있으면 싶었는데, 그 다음에는 (욕심이 생긴 거죠.)

계속 기타 연주를 하던 애가 노래를 하니까, 이제 ‘다음 앨범에는 편곡을 전부 내가 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내가 다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이러다가 한발한발 빠져들었죠. 나중에 음악 파트도 다 돌다가 엔지니어링도 공부하고. 전 정말 정말 럭키한 케이스인 것 같아요.

Q. ‘“A.D.D.a” 곡을 들으면서 진짜 어렵게 작업했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귀가 예민하셔서 그런 거 아닌가요.

그 노래가 아카펠라인 것을 모르고 듣는 사람들은 그냥 슉슉 흘러가도록 디자인됐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Q. 그런 걸 어떻게 다 맞추셨어요?



그건 제가 글 쓰는 친구들한테 “이 문장을 어떻게 썼냐”라고 묻는 거랑 똑같은 거죠.

저는 그냥 음악을 좋아하긴 정말 좋아했던 것 같아요. 저희 어머니께서 내가 평생 네가 한달 만에 안 때려 치고 계속하는 건 기타 말고 본적이 없다고 그러셨어요. 제가 숫자 이런걸 되게 싫어했거든요.

나중에 음향악 공부하다가 미적이 나오는데 제가 얼굴이 하얘지면서 ‘내가 얘한테 쫓겨 다니다가 대학교 때 이 교양 과목을 안 들어서 졸업을 못했는데 여기까지 나타나는구나’ 싶었죠.

Q. 좋아하면 방법을 찾는군요.



네. 전혀 제가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던 일도 제가 좋아하는 일에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면 관심을 기울여야 하거든요.

한번은 동갑내기 사촌이 도스화면으로 컴퓨터를 하길래 제가 ‘짜증나는 인생’ 이러면서 샌님 같은 걔한테 뭐라고 했었는데 걔가 “너 컴퓨터 없이 앞으로 인생 살 수 있을 거 같냐?” 했거든요.

“야 난 음악 할거니까 나는 그 시커먼 화면이랑 전혀 관련 없을 거야” 놀렸다가 제가 나중에 우리나라 미디 컴퓨터 음악 1.5세대로서 음악을 하게 됐어요. 이제 컴퓨터 음악 프로그램을 자체 개발하고 있으니까.. 하하

옛날 시대 작곡가들은 머리에 한번 떠오르는 이야기를 오선지에 빠르게 메모 했었잖아요. 요즘에는 컴퓨터 시스템이 복잡해지다 보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건 늘어났는데 머리에서 악상이 떠오르는 것보다 만들어지는 게 너무 느려요.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 규모 정도의 음악에서, 오선지에 그리는 사람은 심포니를 한번에 그릴 수 있는데, 미디를 쓰는 사람들은 더 느려지는 거에요, 악보 사용법도 둔해지고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거의 실시간으로 스케치를 보여주는 기계가 있다면 어떨까.. 이 때에 여러 사람이 협력하는 게 아니라 한 명이 치고 받는 것을 시뮬레이션 하다 보니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필요할 것 같다... 이게 (음악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의) 시작이었죠.

전 2030년이 오기 전에 자동 작곡 기계가 개발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게 대중음악의 어떤 영역까지 먹어 들어올 지는 모르겠는데 자동 작곡기가 따로 생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걸요. 지금 전화기로 음악 들으시면, 내가 좋아하고 자주 들었던 음악 기록이 남잖아요. 그게 패턴이 확률적으로 계산 되는 것이 거든요.

음악적으로 확률 변수는 굉장히 좁은데, 자동으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조합도 그렇게 숫자가 많진 않아요.

모자르트의 칸타타가 나오는 것은 아닐지라도, 최소한 내가 아침에 일어날 때 모닝콜이 매일 자동으로 만들어져 울린다거나, 그 이후에는 좀 더 복잡한 방식으로, 내가 오늘 간단한 시를 하나 썼는데, 그걸 가사로 해서 이건 어때 저건 어때 자동으로 음악을 만들어주는 거죠.

이 패턴은 사실 몇 년 내로도 가능해요.



Q. 그게 좋은 것 같아요?



네. 그렇게 함으로써 뮤지션이 없어지진 않을 거에요. 21세기는 프로페셔널과 일반 리스너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는 시대이긴 하잖아요. 실시간으로, 리스너가 하루아침에 음악을 만들고요. 자동 작곡기계는 개인을 음악 크리에이션 영역과 조금 더 가깝게 해주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남이 만든 음악을 듣고 그게 ‘내 경험 같아서 좋다’ 이런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심상이 그대로 음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요. 예를 들어 자폐증 치료 같은 거요.

그리고 때로는 부부싸움을 했을 때, 사람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문장으로 수십 페이지를 쓰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어떤 때는 영혼을 소리로 담는 것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요?

Q. 우리도 어렸을 때 심심할 때 혼자 작사, 작곡해서 흥얼거린 경험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걸 잊어먹고, 곡을 쓰는 게 되게 대단한 일인 것처럼 여겨지고 재교육 되기 시작하잖아요. 전 우리 자식들에게 하나도 음악교육을 안 해요. 저희 자식들은 한 명이 멜로디를 부르면 한 놈이 그걸 받아서 후렴구를 만들어주고 있어요. 석기시대 때 인간이 하던 음악과의 유희를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하잖아요. 얘네들이 언제부턴가 이러고 있다가 학교를 다니면 자기들이 지금 부르고 있는 콧노래가 평균율에 맞지 않는다, 화성적으로 틀린 거다, 이런 얘기를 듣기 시작하고, 열다섯 살이 되면 이런 건 어떻게 쓰는 거야 하고 남한테 물어보게 되는..너무너무 자연스럽게 하던 거잖아요, 그걸 왜 남한테 물어봐.

이전에는 피아노 왼손으로 치는 건 둘 다 어렸을 때 해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애들이 그러는 걸 보면서 (피아노 왼손으로 치는 것은) 필요 없고, 애들이 음악하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는 것만 계속 관찰하자 싶었죠.





Q. 요즘은 애들이 뭘 좋아하나요?



우리 애들은 대안학교를 다니니까 딱지치기 이런 걸 좋아해요. 서울 애들과 전혀 상관 없는 유행 패턴을 따르니까요. 우리 애들은 그냥 길에 있는 누구에게나 말을 걸고 그래요.

Q. 아버지 닮아서 그런가요, 어머니 닮아서 그런가요.



아뇨 저는 너무 수줍은 아이였고요. 우리 애들처럼 스스럼없이 남에게 다가가는 건 참 못했어요. 우리 애들이 그렇게 밝게 자란 건 순전히 엄마 덕이죠. 어제였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랑 여섯 명이 밥을 먹고 빙수 먹으러 우르르 몰려 다녔는데, 한 청년팬이 와서 사진을 찍자고 하는 거에요.

애들이 옆에 와서 ‘누구야,’ 하고 물어봐요. 애들 앞에서 사인하는 모습이나 아빠 얼굴을 다른 사람이 알고 있다는 걸 내보이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그 팬이) 사진기를 내밀길래 삼촌 삼촌, 아는 동생이라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자기네들도 같이 사진 찍자고 끼어서 넷이 사진을 찍게 된 거에요. 김치 치즈 바람잡고.. 주위를 둘러보니까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걸 쳐다보다 빵 터진 거에요.

“아빠는 저런 퍼센티지를 저렇게 한꺼번에 웃게 하진 못했는데, 너네 들이 나보다 백배 낫구나” 했죠.



Q. 이번 앨범은 어떻게 들어야 하는 건가요?



글쎄요, 복잡하게 듣고 찢어 듣고 뜯어 듣고 음미해서 씹어주는 사람이 일단 제가 제일 좋아하는 팬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음악을 소중히 여겨주는 태도 같은 것은 음악의 형식에 관련한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오히려 이런 팬들은 변함없다’ 이런 느낌을 저에게 줬던 사람들은 음악에 압도된 사람들보다 제 음악이 자기에게 모티브가 됐던 사람들이에요.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었어요. 나는 청소년시기에 어떤 음악을 듣고 가슴이 뚫리고 음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등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옛날 이런 시절에 나 되게 괴로웠는데 당신 음악이 도움이 됐다든가, 당신 음악덕분에 우리가 결혼을 했다든가, 그런 것들은 그 제 음악의 음표하나하나를 들어보면서 ‘아, 이사람 대단하다’ 라고 하는 사람과는 또 다른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Q: 앨범 중에서는 어느 곡이 가장 애착이 가나요?



지금까지 낸 앨범이 26,7개인데 가장 중요한 앨범이 뭐냐 하면, 아니 그거는 좋아하는 것은 팬이 정해야 할 것이고 중요한 것은 만약 있다 하면, 평단이 정할 것인데, 그냥 요즘에 이 얘기는 많이 해요. ‘그대에게.’ 그 노래는 저한테도 특별한 노래가 된 것 같고요

대중적인 곡이면서 지금까지의 대표 곡이기는 한데 그런 것 보다 저는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자식이 없다는 말을 하긴 하지만 그 곡은 첫 곡이니까 시기상으로 보면 더 이상 연구할 과제가 없는 곡이란 말입니다. 근데 저 곡이 저한테 이제 특별하단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발표 당시엔 히트를 못 쳤어요 생각과 달리. 당시엔 무한궤도가 인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솔로 활동을 하면서 한번 더 녹음을 했다가 몇 년 뒤에 보니까 저 곡이 아직도 우승하고 있는 거에요. 와 질기다. 그리고 몇 년 지났더니 콘서트 끝나고 나면 저 노래가 당연한 앵콜 곡이 되어서 안 하면 사람들이 안가요. ‘그래? 재미있네.’ 저는 또 밉상 캐릭터니까, ‘앞으로 콘서트에서 ‘그대에게’ 하지마.’ 그런 반항심도 있었어요. 이 노래 하나에 얽매이고 싶지 않다. 예를 들어 ‘내 콘서트에 이 노래 하나 들으러 오는 팬들을 버릴 수 있어야 다음 것을 만들 수 있을 것 아니냐,’ 하는 말도 안되는 소리? (웃음). 몇 년 전에는 인터넷에 보면 “‘그대에게’ 너무 좋아요 근데 누구 노래인가요?”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노래 한 곡만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에 처음으로 도달한 거에요. 가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작곡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이 노래가 세상에 살아있게 되는. 그건 이제 이 노래가 독립된 행보를 가는 거잖아요. 뭔가를 만드는 직업에서는 그거야 말로 불멸이죠. 이제 신해철이고 나발이고 모르고 무한궤도도 모르는 애기가 ‘그 노래 좋아요, 근데 누구 노래예요’ 하고 묻는 세상인 거죠.



Q: 팬들에게 친절하신가요?



어 많이 친절해졌죠. ‘그대에게’ 같은 것도 그런데, 앵콜 곡이라서 그런 것인데 내가 오늘 2시간동안 한 것 중 가장 함성이 컸단 말이죠? 근데 콘서트 앞에 연주한 7곡이 신곡인데 그 반응이 ‘그대에게’를 못 따라간다고 하면 내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 것 인가. 근데 지나고 생각해보면 신곡은 아무리 히트를 쳐도 그 자리에 다양한 팬들이 오고 귀에 익은 곡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의 함성소리 같은 걸로 감정에 치받치면 안 된다. 근데 그때는 알아도 싫어!

이번에 쉬면서 봤더니 제가 20대 받았던 콤플렉스 상처가 딱지가 다 앉고 끝났더라고 요. 난 대우를 많이 받았다. 뭐 지금도 욕하는 사람은 있겠지만, 많이 존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 꽤 있으면 느긋하게 해도 괜찮을 거다. 옛날 같으면 따라 부르는데 오버해가지고 혼자 자꾸 중간에 ‘오빠!’ 이렇게 소리지르는 애, 마이크 던지고 공연에서 내쫓고 그러는데. 지금 같으면 웃으면서 구사리 주고 아직1절이야 이러고 안 무안하게 뒷부분에 기회 줄 테니 그때 ‘오빠’해 다시. 지금 이렇게 해요. 옛날에는 그걸 어떻게 정리할지 모르니까 괜히 집중 흩트려 놓으면 괜히 화가 나서 내쫓으려 그러고 그랬어요.



Q . 왜 변했나요, 나이 탓인가?



부드러워졌다는 얘기를 들은 지는 길게 치면 10년정도 돼요. 옛날과 같은 경우 얘기하는 어투나 폭이 조금 부드러워졌다면 요즘에는 많~이 부드러워졌는데 이런 말 들을 정도의 변화.



Q. 계기가 있다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정했다는 거. 40을 불혹이라 하는데 70살쯤에 내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 거에 대한 마음의 대답. 그리고 스무살 때 고민하던 문제에 대한 대답들. 그리고 아직 얻지 못한 대답이지만 그 대답에 대한 대답. 얘는 짊어지고 가는 질문인거지 답은 없는거다 라든가. 이런 것들이 거의 정해진 것 같아요.

그게 기성세대가 된다는 의미인 것 같고. 내가 얻은 답이 남의 답일 순 없지만 답 찾는 애들이 되게 헤매고 있을 때 그런 얘기를 해 줄 수 있는 것은 답을 못하는 같이 고민하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내 딴엔 답을 찾은 것 같은데 어때? 하는 어른들일 수 있다. 그것이 나이 먹고 기성세대가 되는거라는 거라면 왜 그리 기성세대라는 말을 창피해하는지.. 늙는다는 얘기와 다르게 생각한다. 고런 생각들이 정리가 되는 거.

두번째 계기는 애들이죠.

지난 10년간 제가 달성했던 일중 가장 훌륭한 성취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 제가 그런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언성을 높이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었고 와이프한테도 ‘난 어릴 적에 우리 아버지가 소리를 치거나 다른 사람의 언성이 높아지는 거에 예민했었고 아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치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너에게 모든 교육을 맡기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같이 잘해보자’고 했어요.

집에 잠깐 카메라하는 분이 왔었는데 그분이 내실 쪽으로 들어가길래 제가 제지하느라고 소릴 좀 크게 냈는데 애들이 놀래서 운 거에요 제가 애들 붙잡고 아빠가 너희들한테 소리친 적 있냐, 했는데 ‘한번도 없다’고 해서 자랑스러웠어요. 주변에서 ‘그거 쉽지 않은데’ 하면 ‘그지, 맞아. 쉽지 않아’라고 해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저희 집을 보면 ‘대단한 게 아닌 것 같은 게 니가 근본적으로 애들한테 야단칠일이 뭐가 있었겠느냐’ 그러더라고요.



Q. 그러면 집에선 누가 야단치느냐?



원희(부인)요.

저희 집은 원희 퀸에 의해서 통치되는 완전 독재계급국가고. 저랑 개가 하층민. 애들 재워 논다고 해놓고 한 시간 째 안 자잖아요. 그럼 원희가 방문 딱 열고 들어와서 ‘거기 세 사람!’ 그러면 이불 속에 숨었다가 원희 나가면 다시 고개 빼꼼 내밀고. 결국 30분 뒤에 또 들이닥쳐요. ‘아빠 나오세요!’ 그러면 이제 진짜 무섭죠.

원희라도 그러지 않으면 집이 안 돌아가죠. 애들은 이상하게 그래서 저를 엄마라고 불러요.



Q. 여러가지 사회 이슈에 대해서 발언을 많이 하셨어요.



이런 각도로는 첨 얘기하는데, 전 그냥 음악을 한 거에요. 물론 저희 세대에는 조용필 선배가 사운드나 음악에 몰입하는 태도를 봤지만, 그 아티스트가 음악을 하면서 삶의 태도하고 음악을 일치 시키는것을 월간팝송에 소개된 서구 아티스트들을 통해서 교육받았거든요. 존 레논 음악 같은 경우 평소의 행실과 일치한다고 봐요. 그렇게 생각하고 했던 것들이 라디오 DJ를 겸하고 있어서 쉽게 수면에 드러났다는 것뿐이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의견을 내기 위해서 어떤 장소에 나오거나 액션을 취한 게 아니라 이 모든 게 라디오에서 비롯된 거였거든요. 라디오는 하루 종일 나에게 있었던 일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매체, 이런 식이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됐을 때, 하는 수 없다 생각했어요. 뭐 어쩌겠어요. 지금은 기회라는 의미의 규정자체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내가 칼을 내려놓고 살 거냐 아니면 칼을 가지고 살 거냐. 그리고 이 칼이 나를 위한 칼이냐 아니면 강도를 잡기 위한 칼이냐, 이런 규정도 있어야 할 것이고요. 지금 저에게 가장 중요한 규정은, 칼을 갖고 다닌다면 칼집에 넣고 다니자. 칼을 손에 들고 다니는 건 양아치고, 칼집에 넣는다는 것은 그래도 내가 규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잖아요. 언제 꺼내냐에 대한 규정은 항상 똑같아요.

너무 많은 분야에 대해서 발언 한다는 건 그 사람의 말이 가장 값어치 없어지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근데 라디오를 하다 보니 참 이놈이 이거 저거에 다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는 집단하고 개인 프레임이 따로 일어날 때만 만나요. 제가 그런데 나간다는 것을 남들이 얘기 해줘서 알았어요. 감청, 대마초, 체벌도 마찬가지로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집단이 억압해선 안 된다는 거죠. 그렇게 보면 동성애도 마찬가지고.



Q.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고 싶을 것 같아요?



저는 항상 그런 쪽이지만 모르겠어요, 지금은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내 결정이 아니다는 것은 나머지 절반에 대해서 와이프의 결정이다 이런 말이지만 내년쯤부터는 내 결정이 아니다라는 것은 와이프 본인의 결정이다라는 거잖아요. 제가 원희한테 얘기하는 거는 솔직히 애들이 대안학교 다니는 것도 애들이 밝으니까 좋은데, 사람들이 흔히 가는 학교에 가서 이유 없이 학교선생님한테 시달림 받고, 왕따 까지는 심하지만 뭐 경험해봐야 한다... 원희 같은 경우도 외국인 고등학교 나왔잖아요? 동시대사람들과 연대하고 살아가려면 다들 흔히 겪는 일, 학교체벌을 다들 분해했던 것이 남자애들 또래의 연대인 것처럼, 너무 티를 내거나 너무 빨리 유학을 가는 거 좋지 않다. 기러기 아빠 같은 건 난 때려 죽어도 못하니까.

 음악도 마찬가지거든요. 얘가 혹시 내 딸 아들인 거랑 상관없이 음악적 재능이 있는데 내가 음악을 했기 때문에 괜히 노파심에 애의 음악적 재능을 흘려버리는 것은 부모로서 죄다, 딱 이 정도 만 하려고 하니깐요.

좀더 정직하게 말하면, 그냥 아들하고 내일 축구를 할거냐, 아니면 딸년이 남자친구가 있는 것 같은데 아빠한테 뻥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런 문제에 신경을 쓰지.



Q. 잡혀 사는 게 편하지 않아요?



저는 왕자에요. 물론 노비왕자라는 거는 알고 있는데 뭐 행복하죠. 저는 요즘에 괜찮은 남자, 남편은 perfect한 게이친구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는 생각을 해요. 사실 그게 환상이잖아요, 게이라고 다 그런 게 아닌데. 요번 노래 가사에 ‘매달 한번 예민해질 때는 내가 웃겨줄게요’ 이런 구절이 있는데 평소 생활에서는, 특히 우리나라처럼 가부장적인 문화가 남아 있는 곳에서는, 중성화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도 괜찮은것 같아요. (웃음)

Q. 해외활동 생각은요?



저는 20대때부터 유독 해외랑 안 맞았고, 넥스트가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일본이랑 계약하게 됐을 때도 뭐가 안 맞아서 못했고, 그러고 나서부터는 이걸 그냥 라이프타임으로 생각해야겠다. 50살이든 60살이든. 뭐, 원래부터 그러게 생각했어요. 이런 저런 종류로. 락 뮤지션으로 활동하는 거 아니면 또 다른 종류, 뭐 국악 소개 하는 거 등등 뭐 여러 가지로 해외활동이 있을 것 같아요. 근데 싸이처럼 잘되진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외국 나가서 나쁜 짓 많이 할 것 같거든요. (끝)





코리아헤럴드 김후란 논설위원 (hoorankim@heraldcorp.com)

녹취 도움 주신 분: 코리아헤럴드 인턴기자들 (김민진,박규오, 윤지수)